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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의 마지막 승자 – 신라의 삼국통일 이야기 김춘추와 김유신 – 삼국통일의 주역들삼국의 치열한 각축 속에서 신라가 통일국가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건,바로 탁월한 전략가이자 외교가였던 김춘추와 무장으로서 신라군을 이끈 김유신이라는두 인물이 있었기 때문이다.김춘추 – 전략적 외교의 달인진골 귀족 출신으로, 정치적 안목과 외교 감각이 탁월하였다.642년 백제 의자왕의 공격으로 신라가 대야성을 빼앗기자고구려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여 당나라로 직접 건너갔다.당 태종과의 회담을 통해 당-신라 동맹 형성을 성공시켰다.이로 인해 신라는 이후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로강력한 우방국인 당나라의 군사력을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김유신 – 충성과 무력의 상징신라 화랑 출신으로, 전장에서 수많은 공을 세운 군사 영웅으로김춘추와 혼인 동맹을 맺고 신라 .. 2025. 7. 10.
고구려의 황금시대 –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전성기 광개토대왕의 정복 외교와 고구려의 영토 확장고구려 제19대 왕인 광개토대왕(재위 391~413)은그 이름처럼 넓은 땅을 다스린 최고의 정복 군주였다.그의 치세 동안 고구려는 한반도 북부와 만주는 물론,남쪽 백제와 왜(일본)에까지 영향력을 넓히며 동북아의 패권국가로 성장한다.정복 전쟁의 시작광개토대앙은 즉위 직후부터 군사력 강화, 말갈, 후연 등 북방 민족을 제압하고396년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이북 차지,400년 왜군이 신라를 침략하였을때 신라의 원병 요청으로 고구려 군사를 파병하였으며404년 왜의 재침 시도를 격퇴하고 해상 방어 체계를 정비하였다이처럼 광개토대왕은 적극적 원정과 속국화 정책을 통해고구려를 한반도 중심에서 동북아 중심 국가로 키웠다.광개토대왕비의 상징성414년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 2025. 7. 8.
삼국의 창 밖으로 – 고대 한국의 외교와 문화 교류 고구려의 북방 외교와 강성한 군사 외교 전략고구려는 한반도의 북부와 만주 일대를 아우르는 영토를 바탕으로 중국 북방 민족과 한족 세력,그리고 일본, 유목민족과의 외교와 전쟁을 병행했던 국가다.그 중심에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의 활발한 대외 활동이 있었다.외교와 전쟁은 함께였다고구려는 스스로를 강대국으로 인식하며 공격과 방어 외교를 병행하여낙랑군과 대방군을 멸망시키며 중국 세력의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차단하였다중국 북조와의 외교북위, 북연, 북제 등 북조 왕조들과 사신의 왕래와 무역을 하였으며필요 시 군사적 압박을, 때로는 형제국가 형식의 외교 문서를 교환하였다.‘조공 책봉’ 체계에 포함되었지만 자주적 외교 의식이 강하였다.고구려인의 문화 전파벽화와 고분 문화는 중앙아시아 유목문화, 한문화, 고유 문.. 2025. 7. 6.
광복의 빛과 분단의 그림자 – 해방 이후 격동의 대한민국 광복 그날 – 해방의 기쁨과 혼란의 시작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선언과 함께 조선은 35년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한다.수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만세를 외쳤고, 태극기를 흔들며 자유의 기쁨을 누렸다.하지만 이 감격은 오래가지 않았다.조선은 그동안 독립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해방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닌 타력(미군과 소련의 승전)으로 이뤄졌기 때문에새로운 정치적 문제가 곧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미·소의 군정 체제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남쪽은 미국, 북쪽은 소련이 주둔하여각기 다른 이념과 체제를 기반으로 행정과 질서를 수립하였다.정치적 공백과 혼란일제는 무너졌지만 임시정부는 국내 권력 기반 없었다이때문에 일본 관료와 경찰이 그대로 행정을 이어가면서 민심은 불안에 .. 2025. 7. 4.
잊지 말아야 할 민족의 투쟁 –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흐름 3·1운동 – 민중이 외친 자유와 평화의 독립선언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 만세!”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단순한 시위가 아닌, 전 국민이 스스로 참여한 비폭력 저항 운동이었다.바로 3·1운동, 조선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항쟁이다.배경일제의 무단통치(1910~1919): 헌병경찰, 언론 탄압, 민족 말살 정책고종의 죽음(1919.1.21): 독살 의혹 → 민심 분노파리강화회의 영향: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 조선에도 희망 불어넣음이런 상황 속에서 33인의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학생·시민·농민·여성까지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전개와 결과3월 한 달 동안 약 200만 명 이상 참여7,500여 명 이상 사망, 수많은 체포와 고문일본은 탄압에 실패하고, 통치 방식을 무단.. 2025. 7. 3.
대한의 이름으로 선포된 마지막 제국 – 국권 피탈까지의 여정 대한제국의 선포 – 자주 독립의 의지인가, 외교적 고립인가1897년 10월,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다.이는 단순한 국호 변경이나 왕의 칭호 변경이 아닌, 국제 정세 속에서 자주 국가로 거듭나려는 고종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배경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과 아관파천(1896) 이후, 조선은 심각한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은 일본의 위협에 불안감을 느꼈고,돌아온 뒤 “우리도 독립국으로서 황제국 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판단하게 된다.이러한 배경 하에, 고종은 다음과 같은 개혁 조치를 취하게 된다.대한제국의 개혁 방향 (광무개혁)국가 체제 정비: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 강화근대 문물 수용: 군제, 학제, 우편, 철도, 광산 등.. 2025. 7.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