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중앙집권 체제와 왕권 강화
조선의 건국 초기는 강력한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를 수립하는 시기였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와 정도전은 고려의 부패한 귀족 정치와 불안정한 왕권을 거울 삼아, 중앙집권적이고 유교 이념에 충실한 왕도정치를 목표로 삼았다.
특히 태종(이방원) 시기에는 왕권 강화를 위한 제도 개편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개국공신이나 외척 세력의 권력을 제약하고, 6조직계제를 시행하여 왕이 직접 행정을 주도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또한 호패법을 실시하고 인구 파악을 철저히 하며 양전사업을 통해 국토와 인구, 세금을 직접 관리할 수 있는 체제를 정비했다.
세종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유교적 이상 정치를 펼쳤다. 성리학적 정치 철학을 실현하면서도 관료들과 협치하는 공론 정치를 중시했고, 과학, 문화, 교육 등을 적극적으로 발전시켜 왕도정치의 표본을 보여주었다.
문종, 단종, 세조의 시기를 지나며 왕권과 신권의 관계는 긴장과 충돌을 반복했다. 특히 세조는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즉위한 후, 의정부 기능 축소와 집현전 폐지, 그리고 6조직계제 복원을 통해 왕권을 극대화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왕권 강화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교적 도덕성에 대한 도전으로 비쳐지며 후일 사림 세력의 비판 대상이 된다.
조선 전기에는 훈구파라는 공신 중심의 정치 세력이 왕과 함께 정국을 주도했다. 이들은 개국과 수차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며 관직을 세습하고, 성리학보다는 실용주의적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이들의 권력 독점과 부패는 곧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을 불러오게 된다.
사림의 등장과 훈구파와의 대립 – 사화의 시대
15세기 후반, 조선 정치의 새로운 물결이 등장한다. 바로 사림파였다.
사림은 지방에서 성장한 유학자 계층으로, 성리학적 이상에 따라 도덕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젊은 선비들이었다. 그들은 조선 초의 개국공신이 아니라, 청렴하고 강직한 유학자 집단으로서 정치의 도덕성과 학문적 순수를 중시했다.
사림은 성종(재위 1469~1494) 시기에 김종직 등의 인물이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로 진출하면서 중앙 정치에 발을 들였고, 이는 훈구파의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들은 언론 기능을 통해 훈구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곧 훈구파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고, 조선 중기 정치사를 뒤흔든 ‘사화’라는 탄압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대표적인 사화는 다음과 같다:
무오사화(1498):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문제 삼아 연산군이 사림을 대거 숙청함.
갑자사화(1504):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사건을 계기로 발생, 사림과 대신 대거 제거.
기묘사화(1519): 중종 때 조광조가 개혁 정치를 추진하다가 훈구파의 모함으로 몰락.
을사사화(1545): 명종 초 외척 간의 권력 다툼으로 대규모 숙청 발생.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와 같은 사건들은 단순한 정치적 숙청이 아니라, 사상과 정치 철학의 충돌이었다. 훈구파가 실용과 현실 정치를 중시한 반면, 사림파는 이상과 도덕, 성리학 원리에 충실한 정치를 추구했다.
비록 사화로 인해 사림은 수차례 밀려났지만, 그들은 지방으로 내려가 향약을 통한 자치, 서원을 통한 교육과 학문 연구를 이어가며 지속적인 성장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는 조선 중후기 사림 정치의 기반이 되었다.
조선 중후기 사림의 정치 주도와 붕당 정치의 시작
사림은 선조 시기를 기점으로 중앙 정치의 주류 세력으로 재등장한다. 훈구파는 점차 몰락하고, 사림은 과거와 교육 제도를 통해 관료로 대거 진출하면서 왕권과 균형을 이루는 신권의 핵심 주체로 떠오른다.
사림이 중앙 정치의 주류 세력으로 재등장하면서, 이 시기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황, 이이, 서경덕, 조식 등이 있으며, 이들은 학문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치며 사림의 철학적 기반을 공고히 했다.
이황은 도덕적 인간 수양과 경을 강조하며 퇴계학파를,
이이는 실천적 개혁과 율기를 중시하며 율곡학파를 형성하였다.
이처럼 사림은 단지 정치를 위한 집단이 아닌, 학문과 정치, 교육이 융합된 지식 엘리트 집단이었다.
하지만 이들의 성장과 함께 내부 분열도 시작되었다. 바로 붕당(朋黨) 정치의 출현이다. 선조 이후, 사림 내부는 정치적 견해, 학문적 입장, 인물 간 이해관계에 따라
동인과 서인,
이후 남인과 북인,
나아가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었다.
이러한 붕당은 처음에는 공론과 토론 중심의 정치를 이끌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정권 쟁탈을 위한 당파 싸움으로 변질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국난 극복보다는 정적 제거에 몰두하는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며 조선 정치의 불안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그러나 초기 붕당 정치는 오히려 정책 다양성과 권력 분산의 기능을 하였고, 왕권과 신권의 균형 속에서 지속적인 정치 문화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실제로 붕당 간 경쟁은 학문과 정책 발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며, 지방 사림과 중앙 정치의 연결을 통해 정치 참여의 폭도 확대되었다.
결국 사림은 조선의 후반기 정치를 주도하며, 유교적 가치를 바탕으로 정치적 이상과 현실을 접목한 조선 정치문화의 중심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조선의 정치사는 왕권과 사림의 대립이자 협력의 역사였다.
왕은 통치의 중심이었지만, 사림은 도덕과 학문을 기반으로 권력을 견제하며 시대를 이끌었다.
사화는 고통이었지만, 사림은 그 속에서 더 깊이 뿌리내렸고, 붕당은 갈등이었지만, 그 속에서 사상과 제도는 발전해갔다.
왕과 선비, 권력과 이상이 엇갈린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정치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도덕과 권력의 균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울 수 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여전히 ‘공정한 정치’, ‘바른 지도자’, ‘책임 있는 시민’을 고민한다.
그 고민의 뿌리는 다름 아닌 조선의 정치 문화 속에서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