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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동북아의 숨은 제국, 발해 – 그 찬란한 시작과 존재의 의미

by kobs5163 2025. 6. 27.

고대 동북아의 숨은 제국, 발해 – 그 찬란한 시작과 존재의 의미
고대 동북아의 숨은 제국, 발해 – 그 찬란한 시작과 존재의 의미

발해의 건국과 대조영의 리더십

발해는 698년 대조영에 의해 건국된 고대국가로,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정체성을 가지고 시작되었다. 발해는 오늘날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 일부지역의 광대한 영토를 기반으로 삼았으며, 약 230여 년간 존속하면서 동북아 역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 유민으로, 고구려가 668년 멸망한 후 당나라의 통제 아래 편입된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유민들과 말갈족을 결집해 독립국가 건설을 도모했다. 698년, 대조영은 말갈 세력과 연합하여 동모산에서 발해를 세우고, 자신을 진왕으로 칭하였다. 이후 그는 국호를 ‘진’에서 ‘발해’로 변경하며 명실상부한 자주 독립 국가로서의 위상을 드러냈다.

대조영의 리더십은 단순한 무력 통일을 넘어 민족 융합과 자주성 유지에 방점이 있었다. 고구려 유민뿐 아니라 말갈계 주민을 포섭하고, 각기 다른 문화권을 통합하는 포용적 정치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발해는 단기간에 안정된 국가 질서를 갖출 수 있었다.

또한 당나라의 견제와 위협 속에서도 유연한 외교적 역량과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독립을 지켜냈다. 발해는 당나라와 형식적 조공 관계를 유지하되, 실질적으로는 독자적인 정치체제를 운영하며 동북아의 새로운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다.

발해의 건국은 단순한 나라의 탄생이 아닌 고구려 정신의 계승과 자주성에 대한 집념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대조영은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나라를 일으켜 세운 리더로, 고대 동북아 질서를 새롭게 구성한 창조자였다.

발해의 정치·사회·문화 시스템과 ‘해동성국’의 번영

발해는 건국 이후 빠르게 국가 체제를 정비하며 정치, 행정, 사회 구조를 완성도 있게 발전시켰다. 특히 제3대 문왕(대흠무) 시기에는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황금기를 맞이하게 되며, 중국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 불릴 정도로 국력을 인정받았다.

정치 체제는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하면서도 발해식으로 재해석한 3성 6부제를 운영했다. 이는 중앙행정 조직을 체계화한 제도로, 발해가 단순한 부족 연합체가 아닌 중앙집권적 관료국가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지방 행정 역시 15부 62주 체제를 두어, 방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했다.

사회적으로는 고구려 유민이 주축이 되었지만, 다양한 말갈계 주민이 함께 어우러진 다민족 국가였다. 하지만 귀족 중심의 골품적 구조가 유지되었으며, 수도 상경성(오늘날 중국 길림성 돈화)에는 궁궐, 정전, 사찰, 관청이 질서정연하게 배치되었다. 이 상경성의 구조는 장안성(당나라 수도)을 본떠 축조된 것으로, 발해가 국제적 감각과 도시 계획 능력을 갖추었음을 보여준다.

문화적으로는 불교와 유교, 고구려 전통이 혼합된 융합 양식을 갖췄다. 특히 불교는 국가 이념으로 적극 장려되었고, 사찰 건축, 불상 제작, 불경 보급 등에서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 발해의 금동불과 벽화는 고구려 전통을 잇는 예술성이 살아 있으며, 도자기와 청자, 인장 등의 유물도 정교한 세공 기술을 보여준다.

문자는 한자를 기반으로 했지만, 고유의 관용 표현과 표기 체계가 일부 존재했으며, 발해 유민 출신 인물들은 후에 고려와 조선에서도 주요 학문적 인재로 활약한다. 교육 기관과 학문 풍토 또한 조성되어, 발해는 문화 선진국의 기반을 갖춘 문명국이었다.

경제적으로도 농업, 목축, 수공업, 무역이 고루 발달하였고, 동해안 해상로를 통해 일본, 신라, 당나라와 활발히 교류하였다. 발해의 주요 항구인 발해만과 오늘날의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을 잇는 루트는 국제 교역의 거점으로 기능하였다.

이렇듯 발해는 단기간에 정치적 안정과 문화적 번영을 이뤄냈으며, 문왕 치세를 정점으로 고대 동북아시아에서 손꼽히는 강국으로 성장하였다.

동북아 국제질서 속 발해의 위치와 역사적 재조명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유지했으며, 당, 신라, 일본, 거란 등과의 외교를 통해 동북아 국제 질서의 핵심 주체로 활동하였다.

당나라와는 조공 외교를 통해 일정한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는 발해가 자주국이자 문화 강국임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신라와는 처음부터 긴장된 관계를 유지했지만, 서로를 인정하는 균형관계를 형성했다. 특히 발해는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과 전략적 연대를 맺기도 했으며, 일본 측 사서에는 발해를 ‘대발해국(大渤海國)’이라 부르며 외교적 예우를 갖춘 기록들이 남아 있다.

당시 일본은 발해에서 건너온 학자, 승려, 기술자들의 수준 높은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고, 이는 일본 아스카·나라 문화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발해는 동북아시아에서 문화 전파자이자 교류의 매개체로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하지만 10세기 들어 거란의 요나라가 북방에서 급부상하면서 발해는 점차 외교적 고립에 처하게 된다. 926년, 거란의 침략으로 인해 발해는 결국 멸망하지만, 그 유민들은 고려로 이동하거나 주변으로 흩어져 발해인의 정체성을 이어가려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일부 유민은 고려 초기 국정에 참여하였고, '발해는 고구려의 후계자다'라는 인식은 고려사의 기본 틀이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발해는 오랫동안 '중국 동북공정'에 의해 소외된 역사로 취급되었으나, 최근에는 고구려와의 연계성과 민족사의 일원으로서 점차 재조명되고 있다. 발해는 한민족의 뿌리와 자존을 되새기게 해주는 중요한 유산이며, 남북한 공동의 역사자산으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특히 발해의 문화, 도시계획, 외교, 경제는 오늘날 동북아 국제관계 속에서 다문화 국가의 가능성과 통합의 모형으로도 재해석할 수 있다. 발해는 단일 민족주의가 아닌, 다양한 문화를 융합하고 확장해 나간 ‘포용의 제국’이었다.

 

발해는 고대 한민족의 자긍심을 이어받아 다시 일어선 제국이었다. 대조영의 강인한 리더십과 민족 융합의 의지, 문왕의 치세 아래 꽃핀 문화와 제도, 그리고 국제적 존재감까지… 발해는 고구려 이후 한민족이 펼친 또 하나의 문명사적 도전이었다.

역사에서 한때 잊혔던 발해는 이제 우리에게 되묻는다.

우리는 얼마나 우리 과거의 다양성과 확장성을 이해하고 있는가?

그 질문에 답하는 순간, 발해는 과거가 아닌 미래의 거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