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 민중이 외친 자유와 평화의 독립선언
1919년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 만세!”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단순한 시위가 아닌, 전 국민이 스스로 참여한 비폭력 저항 운동이었다.
바로 3·1운동, 조선 역사상 최대 규모의 민족 항쟁이다.
배경
일제의 무단통치(1910~1919): 헌병경찰, 언론 탄압, 민족 말살 정책
고종의 죽음(1919.1.21): 독살 의혹 → 민심 분노
파리강화회의 영향: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 조선에도 희망 불어넣음
이런 상황 속에서 33인의 민족대표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학생·시민·농민·여성까지 전국적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전개와 결과
3월 한 달 동안 약 200만 명 이상 참여
7,500여 명 이상 사망, 수많은 체포와 고문
일본은 탄압에 실패하고, 통치 방식을 무단통치 → 문화통치로 전환
3·1운동은 조선 민중이 처음으로 조직적이고 전 민족적인 독립의지를 표출한 사건이다.
3·1운동의 정신은 이후 이어지는 독립운동의 흐름을 하나로 묶는 정신적 중심축이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 망명 정부에서 시작된 독립의 기틀
3·1운동의 실패 이후, 조선의 지도자들은 “일제와 맞서기 위해선 국가적 조직이 필요하다”는
공감대 아래 상하이에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이것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정 정부이자, 이후 대한민국의 법통이 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919.4.11, 중국 상하이)
임시헌장 선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
독립운동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추진하는 구심점 역할
임시정부는 비록 해외 망명정부였지만,
내부적으로 입법, 행정, 사법 기능을 갖춘 체제를 운영하며
외교, 정보, 군사,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활동 내용
독립신문 발간, 파리강화회의에 외교 사절 파견
한인애국단 조직(김구) → 의열 활동 전개
한국광복군 창설(1940) → 무장 투쟁의 본격화
임시정부는 수많은 위기와 이동 속에서도 대한 독립의 상징으로 존재했고,
이후 대한민국이 수립될 때 헌법적 정통성의 근거가 되었다.
의열투쟁과 무장독립운동 – 총과 폭탄으로 외친 조국 해방
평화적인 외교와 비폭력 저항이 한계에 부딪히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강력한 무장 투쟁을 선택한다.
이는 주로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도시 중심의 의열 투쟁,
다른 하나는 만주·연해주 중심의 무장 독립군 전쟁이다.
의열단과 도시 테러투쟁
의열단(1919, 김원봉 결성): “정의는 칼을 들고 오라”
주요 인물: 김상옥, 나석주, 박재혁 등
활동: 총독부, 경찰서, 친일파 암살, 일제 주요 시설 폭파
대표 사건:
조선총독부 투탄 시도(김익상)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김상옥)
동양척식회사 공격(나석주)
의열단은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지만,
지속적인 활동에는 한계가 있었고, 이후 무장 독립군 활동과 연계된다.
독립군과 항일 무장전쟁
1920년대: 만주, 연해주에 독립군 부대 조직
대표 조직: 대한독립군(홍범도), 북로군정서(김좌진), 서로군정서 등
가장 대표적인 전투는 봉오동 전투(1920.6)와 청산리 대첩(1920.10)
봉오동 전투: 홍범도 부대, 일본군 격파
청산리 대첩: 김좌진 부대가 10일간 10여 차례 대승
이러한 전투는 “조선은 죽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강력히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전개
1930년대 후반: 중국 국민당과 협력해 광복군 창설(1940)
1945년: 미·중 연합작전 참여 예정, 그러나 해방으로 실현은 어려움
3·1운동으로 시작된 독립운동은
임시정부의 조직과 외교,
의열단과 독립군의 무장투쟁으로 이어지며
끊임없이 조국 해방을 위한 불꽃을 지켜왔다.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았다.
말 대신 총을 들고,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을 외쳤던
그들의 이름을 우리는 오늘도 기억해야 한다.
광복은 하늘이 내려준 기적이 아니라,
수많은 이름 없는 이들의 피와 희생 위에 쌓아 올린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