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의 선포 – 자주 독립의 의지인가, 외교적 고립인가
1897년 10월, 고종은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했다.
이는 단순한 국호 변경이나 왕의 칭호 변경이 아닌, 국제 정세 속에서 자주 국가로 거듭나려는 고종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다.
배경
1895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과 아관파천(1896) 이후, 조선은 심각한 정치적 혼란에 빠졌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은 일본의 위협에 불안감을 느꼈고,
돌아온 뒤 “우리도 독립국으로서 황제국 체제를 갖춰야 한다”고 판단하게 된다.
이러한 배경 하에, 고종은 다음과 같은 개혁 조치를 취하게 된다.
대한제국의 개혁 방향 (광무개혁)
국가 체제 정비: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 강화
근대 문물 수용: 군제, 학제, 우편, 철도, 광산 등 서구 기술 도입
지계 발급 사업: 근대적 토지 제도 도입 시도
하지만 대한제국은 실질적으로 외교적 고립 상태에 있었고,
국내적으로도 지주·관료 중심 개혁에 머물며 민중의 삶을 개선하지 못한 한계가 존재했다.
또한,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펼치던 고종의 외교 전략은
곧 심각한 외교적 함정에 빠지게 된다.
러일전쟁과 외교의 함정 – 줄타기 외교의 실패
20세기 초, 대한제국의 운명은 두 강대국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패권 경쟁에 휘말리게 된다.
이 충돌은 곧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이어지며, 대한제국은 그 전쟁의 ‘무대’가 된다.
고종의 외교 전략으로는
친러 정책의 강화를 통해 러시아와 밀착하여 일본의 위협을 견제하고
미국, 독일 등의 열강과 접촉해 외교망의 다변화 시도한다.
하지만 이러한 외교 전략은 효과적이지 못했다.
열강은 자국의 이익에만 관심 있었고, 일본은 대한제국을 전략적 요충지로 간주하고 있었다.
러일전쟁(1904~1905)의 전개와 결과
전쟁 발발 직후 일본군은 한반도에 진주하여 대한제국 정부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1904년 한일의정서를 통해 대한제국의 국방과 외교를 일본이 간섭하여 실질적인 국방과 외교권이 박탈되고
포츠머스 강화조약(1905)으로 미국과 영국의 묵인 속에 일본의 승리가 확정되었다.
결국 러일전쟁은 대한제국의 외교적 줄타기 전략이 실패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고,
그 결과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향하는 외교적 길목을 잃게 된다.
을사늑약과 한일합병 – 강제병합의 수순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1905년, 국제법상 ‘조약’이라는 이름을 달고 강제적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된다.
을사늑약(1905)
조인자: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 (이완용 등)
내용: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 설치
고종은 반대했지만, 협박과 회유 속에서 강제 체결됨
이후 고종은 헤이그 특사(1907)를 파견했지만 국제사회는 외면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한 보호국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일본은 그 다음 단계를 치밀하게 준비해나간다.
정미7조약(1907)
군대 해산
내정 간섭 본격화
고종 강제 퇴위 → 순종 즉위
한일병합조약(1910)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총독 데라우치가 서명
대한제국의 주권 완전 박탈, 일본 제국에 병합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 선포 → 일제강점기 시작
이 모든 과정은:
국민의 동의 없음
황제의 승인 없음
국제적 동의 없음
→ 즉, 불법적이고 강제적인 병합이었다.
일본은 이러한 강제 병합을 ‘합법 조약’으로 포장했으며, 국제 사회는 이에 대해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대한제국은 자주 독립을 선포하고, 근대화를 위한 개혁을 시도했지만,
국제 정치의 흐름과 내부의 불안정성 앞에 방어할 수 있는 힘을 갖지 못한 국가였다.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는 분명한 주권 의지의 표현이었지만,
외교 고립, 정치적 무능, 외세 의존으로 인해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결국 조선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대한제국의 ‘대한’만이
후일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의 국호로 역사 속에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오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시절 외쳤던 "자주"와 "독립"의 외침이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 외침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