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 조기 근대화를 향한 개화파의 도전
1884년 12월, 조선의 젊은 개화파들은 3일간의 짧은 혁명을 시도한다.
이 사건이 바로 갑신정변이다.
배경
당시 조선은 외적으로 청과 일본, 러시아 등 열강의 각축장이었고,
내부적으로는 부패한 양반체제와 낙후된 정치구조로 인해 개혁의 요구가 높아지고 있었다.
개화파는 크게 두 갈래로
청의 힘을 빌어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온건 개화파(김홍집 등)와
일본과 손잡고 급진적인 근대화를 주장하는 급진 개화파(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로 나뉘었다.
김옥균 등이 주도한 급진 개화파는 일본 공사의 지원을 받아 궁중 쿠데타 형식으로 정변을 일으킨다.
그들은 왕실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고종을 장악하고,
내각을 구성해 개혁 정강 14개조를 발표한다.
주요 개혁 내용으로는 문벌의 폐지와 인재 등용, 지조법 개혁, 조세제도 단순화, 군제 개편, 청에 대한 사대관계 철폐 등으로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근대개혁 청사진이었다.
그러나 정변은 불과 3일 만에 실패한다.
조선에 주둔 중이던 청군이 개입하면서, 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처형당했다.
의의와 한계
조선 최초의 근대화 개혁 시도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지지만 외세에 의존한 방식, 민중 기반 없는 개혁이란 한계를 드러냈다
이후 개화파는 실패로 낙인찍히고, 조선은 더욱 청 중심의 외교 노선으로 기울게 된다
동학농민운동 – 민중이 외친 평등과 자주의 함성
1894년, 조선 전역은 가장 큰 민중 봉기에 휩싸이게 된다.
이는 단순한 민란으로는 봃수없는 신분 차별 철폐와 외세 배격, 자주 국가 건설을 외친 혁명적 운동이었다.
동학농민운동이었다.
배경
삼정의 문란에 의한 군포, 전세, 환곡의 부패로 백성 생활 파탄
지주층의 수탈과 관리들의 횡포
동학의 확산으로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평등 사상이 전파되고
외세의 침투에 의해 일본과 청, 서양세력의 간섭이 증가하였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라도 고부의 전봉준은 “조선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며
농민들과 함께 봉기를 일으킨다.
이것이 고부 농민봉기 → 1차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다.
전개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며 전주성을 점령함에 따라 조선 정부는 청에 진압을 요청하여 청군이 파병되고
이에 반응한 일본도 군대를 보내면서 청일전쟁이 발발(1894)하였다
동학 농민군은 청·일 간 전쟁 상황에서 잠시 협상했으나, 일본이 조선에 영향력을 확대하자 2차 봉기를 감행한다.
하지만 일본군의 신식무기 앞에 속수무책으로 패배하고, 전봉준은 체포되어 처형된다.
동학농민운동의 의의
민중이 주체가 된 최초의 전국적 운동
반외세·반봉건 사상이 응축된 대중 운동
조선 정부의 무능, 일본의 간섭, 민중의 분노가 뒤얽힌 복합 역사
갑오개혁의 명암 – 개혁과 간섭 사이의 갈림길
동학농민운동 이후 조선은 급변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 정부를 장악하고, 김홍집 내각을 통해 개혁을 강행한다.
1차 갑오개혁 (1894)
과거제 폐지
신분제 철폐: 노비제도 공식 폐지
탁지아문 설치: 예산과 재정 관리 일원화
경무청 설치: 근대적 경찰제도 도입
국군 재편: 친위대, 진위대 창설
이러한 개혁은 조선이 오랫동안 유지해온 봉건적 체제를 해체하는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2차 갑오개혁 (1895)
홍범 14조 반포: 국가 운영 원칙을 헌법 형태로 명시
교육개혁: 근대 학교 설립, 유학생 파견
사법·행정 분리
지방행정 개편
하지만 이 모든 개혁은 일본의 영향력 아래 진행되었으며,
조선의 주체적 의지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한계
개화파 주도로 이뤄진 위로부터의 개혁
민중 참여 부재, 민심 이반
일본의 정치적 간섭과 병행된 개혁 → 자주성 결여
결국 을미사변(1895, 명성황후 시해) 이후 갑오개혁은 흐지부지
조선 말기, 갑신정변과 동학농민운동, 갑오개혁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선 사회의 변화를 요구했고,
근대국가로 나아가고자 했던 고통스러운 몸부림이었다.
갑신정변은 젊은 개화파의 도전이었지만 외세에 의존한 이상주의였고,
동학농민운동은 민중의 실질적 요구와 저항이었지만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갑오개혁은 개혁의 형식을 갖췄지만, 외세의 간섭으로 자주성을 잃었다.
이 세 사건은 모두 실패했지만,
이들이 남긴 정신은 대한제국의 수립,
근대 민족의식의 태동,
그리고 대한독립운동의 뿌리가 되었다.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 실패의 순간들 속에서도 변화를 향한 용기와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