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된 왕권의 회복 – 흥선대원군의 중앙 집권 개혁
19세기 후반의 조선은 나라 안밖으로 극심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왕권은 이미 무력화되고, 세도정치가 극에 이르러 권력을 독점한 외척 가문들에 의해 국정은 무너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철종이 후사 없이 사망하자, 고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고,
그의 아버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섭정으로 국정을 장악하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취임 직후, 당시 조선의 정치적 혼란과 무너진 조정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강력한 중앙 집권 개혁을 추진했다.
대표적인 개혁 조치로는
세도 정치 타파를 통한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등 세도 가문 축출
서원 철폐를 통한 전국 600여 개 서원 중 47개만 남기고 정리하였으며
성리학 중심의 붕당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과거제 정비를 통한 매관매직 방지, 실력 중심의 관료 등용 추구
법전 정비를 통한 경국대전과 속대전을 재정비하고 집행력 강화
삼정 이정청 설치를 통한 문란했던 전정·군정·환곡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특히 서원 철폐는 유생층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지만,
백성들 입장에서는 사적 권력 축소와 백성 부담 완화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조선 후기의 왕권 회복을 위해 노력한 유일한 지도자였으며,
그의 개혁은 분명 체제 개편의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너무 급진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은 갈등을 낳았고, 유생과 양반층의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민심을 얻다, 민심을 잃다 – 경복궁 중건과 원납전 논란
중앙 집권 개혁의 일환으로, 흥선대원군의 가장 상징적인 사업은 바로 경복궁의 중건(1865년 시작)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되어 방치되었던 경복궁을 복원함으로써,
왕조의 위엄을 다시 세우고 왕권을 상징적으로 부활시키려는 정치적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대규모 공사는 백성들에게 상당한 부담과 고통을 안겼다.
경복궁 중건의 문제점은
강제 노역 동원에 의해 전국에서 수만 명의 인력이 차출되었으며
원납전으로 자발적 기부 형식을 띤 사실상 강제 세금을 내고
중건비용 조달 문제로 상인과 양반, 민중까지 고르게 착취를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재정 확보를 위해 백성들뿐 아니라,
양반과 상인에게도 부담을 지우며 "나라를 위해 희생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이 원납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부정부패와 과잉 징수의 온상이 되었고,
백성들은 “나라가 아니라 대원군을 위한 공사”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또한 전국적 목재 수탈, 전답 침해, 부역 동원 등은 농민의 삶을 무너뜨렸고,
경복궁 중건은 처음에는 민심을 얻었지만 결국 민심을 잃는 계기로 작용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경복궁 중건은 왕권의 회복을 상징했지만,
그 비용과 방식은 왕조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쇄국정책과 외세 침입 – 대원군 외교의 명과 암
흥선대원군의 정치 철학은 한마디로 “오랑캐와 통하지 말라”는 배외주의였다.
그는 서양 세력뿐 아니라, 천주교, 근대 사상 모두를 조선의 질서를 해치는 위험 요소로 간주했다.
그 결과 등장한 것이 바로 쇄국정책이다.
천주교 박해
병인박해(1866년): 수많은 선교사와 조선인 신자 처형
프랑스 선교사 9명 포함 수백 명이 희생됨
의도: 유교 중심 체제를 지키고 외래 종교 차단
외세의 침입과 무력 충돌
병인양요 (1866)
프랑스 군대가 강화도를 침공
정족산성, 문수산성에서 조선군의 격렬한 항전
외규장각 도서 및 보물 대량 약탈
신미양요 (1871)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 후, 미국의 보복 침공
강화도 초지진, 광성보 전투
어재연 장군의 결사 항전으로 미군 철수
이러한 사건은 조선을 일시적으로 지켜낸 것으로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계기가 된다.
흥선대원군은 자신 있게 외세를 물리쳤지만,
이후 조선은 국제정세에 뒤처지고, 근대화를 이룰 기회를 점점 잃게 된다.
그가 물러난 이후, 조선은 결국 강제로 개항(강화도 조약, 1876)하게 되고,
근대사로 진입하기 위한 체계적 준비 없이 시대 변화에 휘말리게 된다.
흥선대원군은 분명 조선 후기의 마지막 개혁자였다.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고, 관료 제도를 정비하며, 세도정치의 잔재를 청산했다.
하지만 그는 백성과의 협력보다는 명분과 권위 회복에 치중했고,
국제질서 변화에 대한 통찰 없이 쇄국으로 일관하며 근대화의 기회를 놓쳤다.
그의 개혁은 단기적 성공,
하지만 장기적 유산은 아쉬움을 남긴 채 끝났다.
그래서 흥선대원군은
어떤 이에게는 조선의 구국영웅,
또 다른 이에게는 조선의 쇠퇴를 앞당긴 보수주의자로 평가된다.
우리는 그 복합적 인물상을 통해 배울 수 있다.
개혁은 방향만큼이나 방법이 중요하며,
외부 변화에 대한 유연한 대응이야말로 진정한 개혁의 완성임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