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도정치의 시작과 권력 독점 – 실종된 왕권
조선 후기, 정조가 죽고 난 후 조선의 정치권력은 왕의 손에서 외척 가문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를 일컬어 세도정치라고 부르며, 그 시작은 순조(1800년 즉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린 순조가 즉위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순조의 장인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한 안동 김씨가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헌종(풍양 조씨), 철종(다시 안동 김씨)로 이어지는 외척 중심의 정치 구조는 약 60여 년 동안 조선 정치를 마비시켰다.
세도정치는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왕권의 형식화: 어린 왕의 즉위 → 실권 없는 군주
외척 세력의 권력 독점: 벼슬은 혈연과 연줄로 결정
관직 매매와 부정부패: 매관매직과 뇌물 정치가 일상화
중앙·지방 행정의 붕괴: 지방 수령도 권세가의 하수인화
조선 전기의 왕도정치와 사림정치가 공론과 유교적 윤리를 중시했다면,
세도정치는 사리사욕과 권세 유지를 위한 사적 정치의 대표적 예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정치는 정체되고 관료제는 마비되었으며,
무엇보다 왕조에 대한 백성의 신뢰는 빠르게 무너졌다.
삼정의 문란과 백성의 피폐 – 무너진 민생
정치 부패는 곧 민생 파탄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삼정의 문란이다.
삼정이란 조선의 세 가지 주요 행정 체제인:
전정 – 토지에 대한 세금
군정 – 병역 관련 세금
환곡 –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는 제도
이 삼정이 무너지고 왜곡되면서, 백성의 삶은 극한의 고통으로 치닫게 된다.
전정의 문란
원칙적으로 토지 소유자에게 부과되어야 할 세금은,
세도 가문과 양반 지주들이 세금을 회피하거나 면제받으며 실제 납세는 소작농 등 하층민에게 집중되었다.
관리는 세금보다 많은 액수를 징수하고, 허위 토지 등록, 가짜 수확량 신고 등으로 사리사욕을 채웠다.
군정의 문란
양반은 병역을 면제받고, 대신 농민과 서민들에게 군포라는 대납금을 부과했다.
그러나 죽은 사람, 이사 간 사람, 존재하지 않는 인물에게도 세금이 부과되었고,
이것은 고스란히 생존자들의 부담으로 돌아왔다.
환곡의 문란
환곡 제도는 원래 기근 시 곡식을 빌려주고 수확 후 돌려받는 백성 구제책이었다.
하지만 세도 정치기에는 이를 수탈 수단으로 변질시켜,
높은 이자,
강제적 대여,
상환을 핑계로한 추가 징수
등의 방식으로 백성을 괴롭혔다.
이처럼 삼정의 문란은 경제적 수탈 구조를 완성시켰고,
사람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할 만큼 삶에 대한 희망을 잃어갔다.
농민은 땅을 잃고 유랑자가 되었고, 유랑자는 도적과 의적, 민란군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민란과 천주교 박해 – 폭발하는 민중의 저항
조선 후기, 삼정의 문란과 정치 부패에 분노한 민중들은 무력 저항에 나서게 된다.
이 시기 각지에서 민란이 속출했으며, 이는 단순한 생계형 반란을 넘어서 체제 자체에 대한 도전으로 발전한다.
홍경래의 난 (1811)
발생 지역: 평안도
배경: 평안도는 중앙에서 소외되고, 지역 차별이 심했던 곳
주도 인물: 홍경래 – 중인 출신, 상업과 무역에 능한 실력자
전개: 민중과 농민이 대거 참여해 지역 군현을 장악
결과: 약 1년 만에 진압되었지만, 조선 정부의 무능 드러냄
이 반란은 ‘변방에서 중심을 향한 저항’이었고, 신분과 지역 차별에 대한 분노가 핵심이었다.
임술농민봉기 (1862)
배경: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
주도: 농민과 향촌 엘리트, 유랑민까지 가세
요구: 부패한 수령과 탐관오리의 처벌, 세금 감면
전개: 70여 개 군현에서 반란 발생
이 반란은 단순한 도적 떼가 아닌, 조직적 요구와 정치적 의식을 지닌 농민운동이었다.
당시 조정은 수습을 위해 ‘삼정이정청’을 설치했지만, 실질적 개혁 없이 일시적 유화 조치에 그쳤다.
천주교 박해
조선 후기 민중의 ‘새로운 믿음’에 대한 갈망은 천주교의 전파로 나타났다.
천주교는 평등 사상, 인내천적 신앙을 내세우며 백성들에게 새로운 위안을 제공했지만,
유교적 질서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심한 박해를 받았다.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오박해(1846)
등 수차례 박해로 수천 명이 순교하였다.
하지만 박해 속에서도 천주교는 민중 속 신앙 공동체로 자리잡았고,
이후 동학 등 민족 종교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
세도정치는 조선의 몰락을 가속화한 결정적 요소였다.
왕조의 정통성은 약화되고, 정치는 사적 이익의 수단이 되며,
민생은 끝없는 수탈과 고통 속에 버려졌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민중은 움직였고, 외쳤고, 싸웠다.
홍경래의 난, 임술민란, 천주교 신앙 공동체…
이 모든 저항은 후일 동학농민운동과 개혁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역사는 반복된다.
오늘의 시대도, 누군가의 침묵과 누군가의 고통 위에 세워질 수 없다.
우리는 과거의 민란을 단순한 폭동이 아닌,
시대의 울분과 민중의 역사적 발언으로 바라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