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와 이상이 충돌하다 – 고려 말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의 갈등
권문세족의 등장과 고려 후반 권력 구조
고려의 후반부는 정치·사회적으로 대격변의 시기였다. 특히 원 간섭기를 거치며 고려는 외세의 영향 아래 놓였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지배 엘리트 계층, 즉 권문세족이 등장했다.
대규모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고위 관직을 독점한 귀족 가문 중심의 특권층인 권문세족은 고려 초기 문벌 귀족과는 달리, 원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권력을 얻고 유지한 친원파였다. 예를 들어 기철(奇轍) 가문은 원나라와의 혼인 관계를 통해 고려 내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으며, 이는 왕권을 압도할 만큼 강력한 정치력을 갖게 했다.
이들은 국정을 농단하고, 지방 관리에 친인척을 배치하며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국가 기강을 해이하게 만들었다. 대토지를 소유하고 노비를 늘려가며 세금을 회피하거나 수탈을 일삼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국왕이 정치를 하려 해도 권문세족의 눈치를 봐야 할 정도로 왕권은 약화되었고, 국가의 행정 시스템은 마비 상태에 가까워졌다.
또한 권문세족은 불교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사찰의 토지를 이용해 경제적 기반을 더욱 강화했다. 그 결과 사찰과 귀족이 연계된 부패 구조가 형성되었고, 민생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처럼 고려 말기의 권력 구조는 몇몇 특권 가문이 모든 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하는 구조로 변질되었고, 이로 인해 민심의 이반, 지방 사회의 불만, 새로운 개혁 세력의 등장을 촉진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신진사대부의 형성과 유학을 통한 개혁 의지
권문세족의 횡포에 대항하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한다. 그들이 바로 신진사대부였다. 신진사대부는 말 그대로 ‘새롭게 진출한 선비 계층’으로, 지방 향리나 중소 지주 출신들이 과거를 통해 중앙 정치 무대에 진출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고려 후기 성리학의 수용과 함께 도덕과 원칙, 실천 중심의 정치 개혁 이념을 갖고 있었다. 성리학은 인간의 본성과 천리를 탐구하고, 군주의 도덕성과 사회의 질서를 중시하는 사상으로, 신진사대부에게는 불의한 현실을 바로잡고자 하는 철학적 무기가 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정몽주, 이색, 길재 등이 있다. 이들은 고려의 충신으로서 개혁을 도모했지만, 권문세족의 저항과 현실의 한계에 부딪히며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겪게 된다.
또한 신진사대부는 다음과 같은 개혁을 주장했다:
불교의 억제 및 유교의 강화: 사찰의 과도한 권력을 견제하고, 유교 교육과 유학 중심의 행정을 강화하려 했다. 이는 국립교육기관인 성균관의 재건과 유학교육 강화로 이어졌다.
토지 제도의 개편: 권문세족이 독점한 토지를 환수하고, 공적인 전시과 체제를 복원하려는 시도를 했다.
왕권 강화와 법 제도 정비: 왕권을 권문세족보다 우위에 두고, 법을 통해 사회 질서를 바로잡으려 했다.
이들은 단순한 비판 세력이 아니라,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지식인 주도 개혁 세력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내세운 유학적 이상은 권문세족의 기득권과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이 대립은 피할 수 없는 정치적 격변의 서막이 되었다.
사상과 권력의 충돌 – 고려 말 개혁 운동과 조선 개국
신진사대부는 이상을 꿈꾸며 고려 개혁을 시도했지만, 권문세족의 강력한 저항과 내부의 분열로 인해 두 갈래로 나뉘게 된다. 바로 온건파 신진사대부와 급진파 신진사대부다.
온건파는 정몽주, 길재 등으로, 고려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이들은 충절과 유교 윤리를 중시했고, 고려 왕실에 끝까지 충성했다.
급진파는 정도전, 조준, 권근 등으로, 고려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새로운 국가 질서를 수립하자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토지 개혁, 불교 폐쇄, 신분제 개편 등 급진적 개혁을 지향했다.
이들의 갈등은 고려 말 외세(홍건적, 왜구)의 침입과 왕권의 무능함, 백성의 피폐함이 더해지며 극단적인 정치 혁명의 계기로 이어진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이성계다.
이성계는 무신으로서 급진파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개혁 세력의 군사적 기반이 된다. 위화도 회군(1388년)은 그 결정적인 사건으로, 이 회군을 통해 이성계는 실권을 잡고 최영 등 온건파와 권문세족을 제거한다.
결국, 1392년 이성계는 고려를 멸하고 조선을 건국한다. 이 과정에서 정도전은 유교 중심의 국가 이념을 수립하고,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국가 체제를 구상한다. 이는 고려와의 단절이 아닌, 신진사대부의 이상을 실현한 결과이자, 고려 후기 갈등의 역사적 마무리였다.
그렇다고 해서 고려 말이 단지 멸망의 서사만은 아니다. 그 과정은 새로운 시대를 위한 사상적, 제도적 준비 기간이었으며,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이행기적 의미를 갖는다.
고려 말은 권력과 사상이 충돌했던 정치사의 전환점이다. 권문세족은 기득권을 지키려 했고, 신진사대부는 도덕과 개혁을 외쳤다. 이들의 싸움은 단지 정치 투쟁이 아니라,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은 결국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로 이어졌고, 성리학적 질서와 제도의 틀이 그 대답이 되었다.
정몽주의 충절도, 정도전의 이상도 모두 이 땅에 깊은 질문을 남겼다.
오늘날 우리 역시 격변의 시대를 살아간다. 권력과 도덕, 변화와 유지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고려 말의 갈등은 단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깊은 통찰을 던져주는 거울이다.